백록담 앞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(한라산)
백록담 앞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— 한라산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
제주도를 열 번쯤 다녀왔지만, 한라산만큼은 늘 미뤄왔다.
"언젠가는 올라가야지." 그 '언젠가'가 드디어 왔다.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를 탄 그날, 나는 처음으로 한라산을 마주했다.
새벽 5시, 성판악 주차장
백록담까지는 왕복 8시간 안팎이 소요되기 때문에 체력을 안배하고 간식을 든든히 준비해야 한다. 그걸 알면서도 나는 김밥 두 줄과 물 한 통만 달랑 들고 나타났다. 한마디로 준비 부족이었다.
이른 새벽, 주차장에는 이미 등산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. 아이젠, 등산 스틱, 두꺼운 방한복. 나는 그 틈에서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.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.
그래도 발걸음을 내딛었다. 성판악 코스 입구, 해발 750m. 여기서 정상 백록담까지는 9.6km. 편도만.
처음 두 시간 — "이거 생각보다 쉬운데?"
성판악 코스 초반은 가벼운 산책 정도의 느낌이었다. 울창한 숲길, 새소리, 촉촉한 흙냄새.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.
'나 등산 좀 하는 사람이었나?' 하는 착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.
그 착각은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서 산산조각 났다.
해발 1,500m 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다
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졌다. 돌길, 바위, 또 돌길.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났다.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. 앞사람의 등산화 뒷굽만 보며 한 발 한 발 올라갔다.
그때 옆에서 70대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천천히, 그러나 꾸준히 나를 추월해 갔다.
"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힘들어해?" 농담처럼 던지고는 사라지는 뒷모습. 나는 그 자리에서 5분을 쉬었다.
백록담, 그리고 예상치 못한 눈물
정상에 도착한 건 출발 4시간 30분 만이었다.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, 눈앞에 펼쳐진 백록담을 보고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.
백록담은 한라산 신선이 타고 다니던 흰 사슴이 물을 먹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. 그 오래된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, 눈앞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.
그리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.
회사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제주로 왔던 것, 매일 밤 천장만 바라보며 잠 못 이루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. 1,947m 정상에서, 바람 맞으며, 꼴사납게.
그런데 이상하게도 창피하지 않았다.
하산길에 깨달은 것
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무릎이 더 아팠다.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다. 뭔가가 정리된 기분이었다.
가을 끝자락, 단풍이 거의 진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. 그 바람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.
성판악 주차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.
한라산에 오르기 전, 꼭 알아두세요
제가 몸으로 배운 것들입니다.
준비물은 절대 타협하지 마세요
- 등산화 필수 (운동화는 정말 힘듭니다)
- 물 최소 1.5L 이상 — 한라산은 약수터와 매점이 없어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
- 간식은 초콜릿, 에너지바, 김밥 추천
- 기온 변화가 심하니 얇은 옷 여러 겹 레이어링
코스 선택 팁
- 처음이라면 성판악 코스 추천 (9.6km, 편도 약 4시간 30분, 비교적 완만)
- 좀 더 도전적으로 관음사 코스 (험하지만 풍경이 압도적)
- 백록담 정상 코스는 사전 예약 필수 (무료)
시간 관리가 생명
- 반드시 새벽 일찍 출발할 것
- 입산 통제 시간이 있으니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
마치며
한라산은 저에게 "지금 네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"는 걸 몸으로 가르쳐 줬습니다. 정상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. 올라가는 그 과정이 전부였습니다.
아직 한라산을 못 가보신 분들께,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합니다. 땀 흘리며 올라간 그 자리에서, 분명 자기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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